[김지수 칼럼] 죄와 벌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입력 2020.07.15 07:00 수정 2020.07.16 21:47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인구 천만의 대도시 서울. 펄럭이는 태극기와 출렁이는 촛불로 ‘광장 정치’의 문을 활짝 열었던 3선 시장이 고인(故人)이 됐다. 고인(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업적을 치하하고 애도하는 자, 고인의 죄와 벌을 심판하는 자로 여론 광장은 홍해처럼 갈라졌다.

누군가는 한 세대가 죽어야 성추행의 악습과 악취가 사라질 거라고 했고, 누군가는 무소불위의 고위 공직자 권력을 제어할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섣불리 죄를 단정하지 말라고 했고, 누군가는 이미 죗값을 치렀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나약한 인간의 죄성에 대해 탄식했다.

질문을 던져본다. 인간은 믿을만한 존재인가?

‘신뢰의 법칙'을 쓴 사회심리학자 데이비드 데스테노 박사는 질문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누군가가 이 시점에서 믿을만한 사람인가?’로 바꿔서 사고해야 한다는 것. 우리의 상황은 늘 가변적이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이 얻거나 잃을 것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믿을만한 사람과 못 믿을 사람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각자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신뢰는 그때그때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다만 신뢰가 남는 장사인 것은, 신용과 좋은 평판이 우리를 더 나은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믿을만한 존재라서 믿는 게 아니라, 사회적 진화의 지혜로 ‘믿는 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 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들에겐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았다. 피할 수 없는 의제는 죽음이라는 행동의 의미다. 어떤 사회적 죽음은 죽음으로서만 자신의 고통과 결백을 호소한다. 전태일, 김용균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그랬고, 그 애도의 자리에서 인간중심의 더 나은 시스템을 향한 연대와 개선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남은 이들은 더 거대한 슬픔과 혼란에 빠진다. 확실한 것은 더이상 ‘죽으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죄는 무엇이고 벌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의 역작을 남긴 러시아 소설가 도스트옙스키.
‘가난한 사람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의 역작을 남긴 러시아 소설가 도스트옙스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죄를 ‘선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가난한 법학도인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리대금업자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스스로가 구별된 정의의 초인이라는 신념에 입각해서. 그러나 이후 법적 처벌보다 더 극심한 자기혐오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쏘냐라는 여인을 만나 자백한다.

쏘냐의 첫마디는 "오! 불쌍한 사람!"이다.

쏘냐는 그에게 두 번째 선을 넘을 것을 권한다. "광장에 나가서 네거리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고백하라"고. 자아의 감옥에서 죄가 아닌 공간을 향해 넘어가라고. 거리로, 광장으로, 시베리아 유배지로. 소설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유를 향해가는 여정은 감옥으로 가는 과정과 중첩된다. 쏘냐가 동행한 머나먼 여정 끝에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는 구원받는다.

‘죄와 벌'은 선을 넘은 자와 함께 우리가 더 나은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심리학적 보고서다.

더 넓은 광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나와 세계가 부딪치는 격렬한 충돌을 견뎌야 한다. 영화 ‘멜랑콜리아'에는 행성 충돌로 지구가 예고된 멸망을 맞는 순간이 나온다. 양탄자를 깔고 어깨동무를 한 채 거대한 우주 폭풍의 재난을 맞는 저스틴과 클레어 자매에 비해, 위력적이었던 남자주인공 존은 종말에 앞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것을 비통이라할까, 장렬이라 할까.

쌓아온 확신과 업적이 크고 높을수록, ‘자기 순결'과 ‘자기 모멸’의 간극도 커지는 게 인간 존재의 어두운 심연이다. 분명한 것은 한 세계의 종말, 가치의 전환을 감당하지 않고서는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존엄을 훼손한 과오가 있다면,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밝혀져 재발을 막는 시스템의 기반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