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부총리의 민망하고 위험한 '美 재무부 역학관계' 발언

조은임 기자
입력 2020.03.23 11:41
한국은행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6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체결을 발표한 다음날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외신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기재부가 출입기자단에 보낸 녹취록엔 "10년전 통화스와프 체결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역학구조상 재무성이 나름 영향력을...." 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에 진짜 친필편지를 보냈냐'고 묻는 말에 답한 것인데, 곱씹어볼수록 민망하고도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에게 어떤 맥락이었는지 물어봤다. "미국 재무부가 연준의 의사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므누신 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식으로 말하더라"라는 답변을 들었다.

홍남기 부총리는 리먼 브러더스 파산이 있었던 2008년 워싱턴 D.C에서 주미 대사관 재경관으로 근무했다. 그해 10월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맺는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에 미국 재무부와 연준의 역학관계(?)를 잘 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홍 부총리 발언은 ‘자신이 미국 재무부를 통해 미 연준을 움직이게 했다’는 뉘앙스로 읽힐 수도 있다.

경제계 인사들 여럿은 이 민망한 공치사(功致辭)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군다나 언론에서 한은과 미 연준의 빠른 결정을 추켜세우는 상황에서 나온 경제부총리의 발언이라 더욱 궁색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홍 부총리의 발언이 영문으로 번역돼 미국으로 전해진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상상하니 더 아찔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금융계에 몸을 담았던 그 누구도 '미국 재무부가 연준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기억하지 않았다. 그 당시 미국 워싱턴 D.C 금융기관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재무부와 연준 사이에 역학관계라 할 만한 건 전혀 없다. 한국도 이제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확보됐지만 미국은 훨씬 전부터 연준이 독립성을 가져왔다"고 했다. 또 다른 인사는 "부총리 발언을 미국에서 알게 되면 굉장히 한국이 우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이번 통화스와프 계약 체결 후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의 리더십을 강조한 것도 이같은 논란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 총재는 통화스와프 체결 관련 기자들과의 질의를 마친 뒤 한은 공보실을 통해 "통화스와프 논의 과정에서 총재 역할보다는 '미 연준의 리더십, 파월 의장의 빠른 결단'이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는 전 과정에서 기재부의 역할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실무 협상은 미 연준의 카운터파트인 한은이 주도하고 있어, 기재부의 공치사는 늘 낯 뜨겁다는 반응을 낳을 수밖에 없다. 홍남기 부총리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이번 통화스와프는 한은과 미 연준이 발빠르게 성사시킨 것으로 매우 자랑스럽다." 굳이 민망하고 위험하게 공치사를 하지 않았더라도 그 공을 같이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