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에서 6년 만에 '탈퇴'로...텔레그램, 보안성의 빛과 그늘

박소정 기자, 정민하 기자
입력 2020.03.29 14:12 수정 2020.03.29 14:19
2014년 사이버 검열 논란 일자 ‘망명 운동’
6년 뒤 2020년 ‘n번방’ 사건에 ‘탈퇴 운동’
‘홍콩 민주화 시위’ 참가자들도 사용했지만

각종 범죄 온상지로 전락…‘보안성’의 명암

"사이버 검열 쉬운 카카오톡 버리고 텔레그램으로 망명(亡命) 갑시다." <2014년 9월>
"‘n번방’ 수사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텔레그램 탈퇴 총공(격)을 진행합니다." <2020년 3월>

해외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이 6년 만에 다시 한국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2014년 박근혜 정부 당시 사법당국의 강화된 사이버 검열 방침에 따라 검열당하지 않을 ‘망명지’로 주목 받았던 텔레그램이, 2020년 ‘n번방’ 같은 범죄 온상지로 활용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탈퇴 운동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안성’이라는 강점이 만들어 낸 텔레그램의 명암(明暗)이 이런 기현상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 /조선DB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 /조선DB
◇2014년 사이버 검열 논란에 ‘텔레 망명’→2020년 n번방 사건에 ‘텔레 탈퇴’
최근 텔레그램에서는 이른바 n번방 사건을 공론화하기 위해 집단 탈퇴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트위터·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SNS)를 중심으로 퍼진 이 운동은 다수의 인원이 정해진 시각에 동시에 텔레그램을 탈퇴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탈퇴 사유에 n번방 사건의 실체를 알리고, 국내 경찰·검찰의 수사에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을 적으면 된다. 수사당국을 지원하고 텔레그램 본사를 압박하려는 목적이다. 지난 25일 오후 9시에 1차 운동이 이뤄졌고, 29일 오후 9시 2차 운동이 예정돼 있다.

이는 6년 전 박근혜 정부 당시, 대대적으로 텔레그램 망명 운동이 유행한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2014년 9월 검찰은 ‘사이버 허위사실 유포 전담 수사팀’을 신설하고 인터넷 포털과 커뮤니티 사이트, 모바일 메신저도 모니터링할 방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대통령 모독 발언이 도를 넘었다. 사이버상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아니면 말고 식’ 폭로성 발언이 사회의 분열을 가져온다"는 박 전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이틀 만에 전격 구성된 것이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각종 소셜미디어(SNS)에는 오는 25일·29일 오후 9시 ‘n번방 텔레그램 탈퇴 총공’ 운동을 안내하는 포스터가 공유되고 있다. /인스타그램 캡쳐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각종 소셜미디어(SNS)에는 오는 25일·29일 오후 9시 ‘n번방 텔레그램 탈퇴 총공’ 운동을 안내하는 포스터가 공유되고 있다. /인스타그램 캡쳐
검찰의 대대적인 사이버 수사를 둘러싸고 일각에서는 자칫 ‘사이버 검열’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최근 여론 전달 수단이나 자기 표현 등이 주로 SNS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검찰의 사이버상 들여다보기가 어디까지로 번질지 장담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논란이 커지자 검찰은 "모바일 메신저는 모니터링하지 않는다"는 해명을 내놨다. 카카오도 당시 블로그를 통해 입장자료를 내고 "카카오톡에 대한 감청 요청은 2013년 86건, 2014년 상반기 61건이 있었다"며 "법원으로부터 발부되는 영장에 의해 집행됐으며 추후감청 요청에 대해선 앞으로 발간하는 투명성보고서를 통해 주기적으로 공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검열에 대한 공포감이나 정치적 의사 표현에 대한 위축 심리가 조성됐다. 이에 사람들은 해외에서 서버를 운영하고 있어 국내에 서버를 둔 다른 메신저들보다 검열에서 안전하다고 알려진 텔레그램으로 메신저를 갈아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국내에서 생소했던 텔레그램은 한국에서 인기 무료 앱 다운로드 순위 1위를 차지했고, 텔레그램 국가별 다운로드 순위 1위에는 한국이 오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이른바 ‘텔레그램 사이버망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텔레그램 망명의 속도는 점차 가속화됐다. 2014년 9월 앱스토어에서 순위권 100위권 밑이던 텔레그램은 검찰의 사이버 검열 강화 발표 이후 일주일도 안돼, 45위까지 뛰어올랐다. 한달 뒤에는 부동의 1위를 지키던 카카오톡까지 제쳤다. 수십만에 머물렀던 국내 이용자 숫자는 금세 100만명을 넘어섰다. 텔레그램 본사는 국내 사용자가 급증하면서, 한달 뒤 10월 텔레그램 한국어 버전을 출시했다.

◇‘보안성’이 자아낸 빛과 그늘…‘홍콩 시위 참가자’도, ‘아동 성착취 범죄자’도 애용
‘망명’과 ‘탈퇴’라는 180도 다른 두 반응은 모두 텔레그램의 뛰어난 보안성이란 특성에서 비롯됐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출신 파벨 두로프(36)와 니콜라이 두로프(40) 형제가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검열을 피해 2013년 독일에서 만들었다. 메시지 암호화, 대화 삭제, 비밀 대화 등이 장점으로 꼽힌다.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 페이스북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 페이스북
특히 참가한 사용자 기기에만 메시지 내용이 저장되는 비밀 대화 기능은 ‘종단간 암호화(End-to-end encryption)’ 기술을 활용한 것으로, 송신자와 수신자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이를 가로채 해독할 수 없다. 읽은 메시지들은 일정 시간 후에 자동으로 기기에서 삭제될 수 있고, 상대에게 보낸 메시지도 삭제·수정이 가능하다.

보안성은 명과 암을 동시에 조성했다. 우선 대화 내용이나 개인정보 유출 걱정 없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메신저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부의 협조 요청에도 쉽게 응하지 않아 권위주의·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활동가들의 소통 창구로도 쓰이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7월 홍콩 민주화 시위 참가자들은 당국의 감시를 피해 텔레그램을 적극 활용했고, 한 달에만 11만명이 새로 가입했다.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이뤄진 성 착취 영상 공유방의 시초인 ‘갓갓’ 등의 ‘n번방’을 모방, ‘제2 n번방’을 운영해 여중생의 성을 착취한 ‘로리대장태범’이 운영한 텔레그램방. /강원지방경찰청 제공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이뤄진 성 착취 영상 공유방의 시초인 ‘갓갓’ 등의 ‘n번방’을 모방, ‘제2 n번방’을 운영해 여중생의 성을 착취한 ‘로리대장태범’이 운영한 텔레그램방. /강원지방경찰청 제공
동시에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도 보안성에 기대 숨을 수 있는 장(場)으로 악용됐다. 미성년자 성을 착취해 영상을 찍게 하고 이를 돈을 받고 공유한 n번방 사건도 이 메신저에서 벌어졌다. 지난해 서울 강남 클럽 ‘버닝썬’에서 사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불법 ‘강간 약물’, 이른바 ‘물뽕(GHB)’ 거래도 이곳에서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실제 구글 등 포털사이트에서 ‘물뽕 구입’을 검색해보면, 판매자가 전화번호가 아닌, 텔레그램 주소를 안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외에서도 이미 텔레그램과 관련한 유사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IS)는 테러를 종용하는 창구로 텔레그램을 이용했다. 애플은 2018년 텔레그램에서 아동 음란물이 넘쳐난다며 iOS 앱스토어에서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을 일시 삭제한 적 있다.

◇서버·본사 위치 비공개, 연락 수단은 오로지 이메일…수사기관 ‘곤혹’
n번방 사건과 관련해서 수사기관은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유사 n번방으로 가장 활발히 활동해 온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24·닉네임 박사)과 ‘고담방’ 운영자 전모(38·닉네임 와치맨) 등이 검거되긴 했으나, 이외 수많은 단순 가담자들이나 창시자로 알려진 ‘갓갓’ 등을 추적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이를 위해선 텔레그램 본사의 협조가 중요하다.

텔레그램에서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박사’ 조주빈(24)이 지난 25일 오전 검찰에 송치되기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오종찬 기자
텔레그램에서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박사’ 조주빈(24)이 지난 25일 오전 검찰에 송치되기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오종찬 기자
그러나 텔레그램이 설립 후 영국·싱가포르·아랍에미리트 등 소재지를 수시로 옮겨다녀 서버와 본사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국내 지사나 국내 대리인도 없는 상황이다. 연락 수단은 오로지 이메일 뿐. 경찰과 방송통신위원회도 텔레그램 측에 접촉을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 감감 무소식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이버 외교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텔레그램의 서버 위치가 모호해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범죄 수단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면서 "사실 텔레그램보다 더한 위커·디스코드 등 해외 SNS와 메신저는 많다. 유사한 문제가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혼자선 힘들고 국제 공조가 가장 중요하다"며 "정부가 이제는 사이버 공간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외교적 대응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