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바이러스’라 비난했지만…결국 필요한 건 ‘중국산 인공호흡기’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입력 2020.03.25 17:59 수정 2020.03.25 18:02
미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중국 바이러스’라 부르며 중국을 비난하면서도, 전염병 통제를 위해 중국산 제품에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국가 위기 속에 의료장비와 방역 용품이 부족해지면서 중국산 제품 사용은 더 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급기야 ‘이제 중국 바이러스란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항복했다는 평까지 나온다.

미국 전기차 기업 테슬라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CEO)는 중국에서 구매한 인공호흡기 1255대를 미국에 보냈다고 24일(미국 시각) 밝혔다. 테슬라 최고경영자인 머스크는 이날 트위터에 "중국이 (인공호흡기) 공급 과잉 상태라, 미국식품의약청(FDA)이 승인한 레스메드, 필립스, 메드트로닉의 산소호흡기 1255대를 20일 로스엔젤레스로 항공 운송했다"고 썼다. 머스크가 중국에서 조달한 산소호흡기는 병원으로 전달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환자 치료에 쓰일 예정이다. 레스메드와 메드트로닉은 미국 기업, 필립스는 네덜란드 기업이지만, 중국 공장에서 인공호흡기를 제조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6월 29일 G20(주요 20국) 정상회의가 열린 일본 오사카에서 별도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중국 신화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6월 29일 G20(주요 20국) 정상회의가 열린 일본 오사카에서 별도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중국 신화사
미국은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지만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의료장비가 부족해 감염 진단과 치료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 존스홉킨스대 발표에 따르면, 이달 1일 미국 내 확진자 수는 100여 명 수준이었으나, 24일 오후 2시(미 동부 시각) 기준 5만 명을 넘어섰다. 진단 키트가 모자라 검사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 상황을 감안하면, 실제 감염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특히 미국에선 중증 환자 치료에 필요한 인공호흡기가 크게 부족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내 확진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뉴욕주의 앤드루 쿠오모 주지사는 23일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뉴욕주에 있는 인공호흡기는 5000~6000개뿐이며, 당장 3만 개가 더 필요하다"며 "인공호흡기를 구해올 사람을 중국에 보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병원협회 정보에 따르면, 현재 미국 병원들이 보유한 인공호흡기는 20만 개 정도에 불과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 자동차 회사들에 차 생산 라인을 개조해 인공호흡기를 만들어 내라고 요구한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2일 트위터에 "포드, 제너럴모터스(GM), 테슬라가 인공호흡기와 다른 금속 제품을 빨리 만들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자동차 업체 임원 여러분이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며 생산을 압박했다. 아직 미국 자동차 기업 어느 곳도 인공호흡기를 생산할 준비가 되지 않은 가운데, 테슬라 CEO 머스크가 중국에서 인공호흡기를 구해서 미국으로 보낸 것이다.

미국 메드트로닉이 생산하는 인공호흡기. /메드트로닉
미국 메드트로닉이 생산하는 인공호흡기. /메드트로닉
인공호흡기는 중환자의 생사를 가르는 의료장비다. 그동안 스마트폰·자동차 등을 만들던 여러 제조업체들이 국가 위기 속에 마스크 등 의료용품 제조사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산소호흡기 생산은 전혀 다른 얘기다. 특수 부품과 전문 지식·기술이 필요한 의료장비이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의 제조업체가 이른 시일 안에 대규모 생산을 해내기가 쉽지 않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중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가 급격히 줄면서 이제 중국 기업들이 만든 인공호흡기를 외국에 수출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특히 이달 들어 생산된 제품은 거의 외국으로 가고 있다. 중국 공업신식화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달 3일 기준 중국 인공호흡기 제조사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가 집중된 후베이성에 외과용 인공호흡기 2900개, 비외과용 인공호흡기 1만4000개를 보냈다. 그동안 중국 내 수요를 공급했던 중국 업체들이 이젠 바이러스가 급속히 확산 중인 외국에 보낼 인공호흡기를 생산하고 있다.

외출 금지령을 내린 미 캘리포니아주의 출라비스타시 경찰서는 최근 중국 선전의 드론(무인기) 제조사 DJI가 제작한 드론 두 대를 구입했다. 전염병 통제 작업에 쓰기 위해서다. 스피커와 야간 투시 카메라를 단 DJI 드론이 하늘에 떠서 순찰 업무를 맡는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을 겨냥해 정부기관이 외국산 드론을 구입 또는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 공포를 검토했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중국산 드론 금지를 추진하던 미국에서 국가 위기를 맞아 중국산 드론이 맹활약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태스크포스 브리핑을 하고 있다. /폭스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태스크포스 브리핑을 하고 있다. /폭스뉴스
전염병 확산 억제를 위해 어떤식으로든 중국이 필요한 현실 속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중국 바이러스’라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누구나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더는 (논란으로 인한) 문제를 만들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인종 차별 논란이 일자 내키지는 않지만 한발 물러선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의도적으로 ‘중국 바이러스’라 불러 왔다. 19일 브리핑 중엔 연설문에 적혀 있던 ‘코로나바이러스’ 단어에서 ‘코로나’를 지우고 펜으로 ‘중국(chinese)’이라 적은 게 워싱턴포스트 사진 기자의 사진에 포착되기도 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우한 바이러스’란 표현을 쓰며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중국 정부는 ‘중국 바이러스’ ‘우한 바이러스’란 표현을 써가며 중국에 전염병 책임을 씌운 미국 정부를 향해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0일 정례 브리핑 중 ‘중국 제조(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에 바이러스가 있다’는 말에 발끈하며 "중국 제조 바이러스라고 말하는 사람은 중국산 마스크를 쓰지 말고, 중국산 방호복을 입지 말고, 중국산 호흡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