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 조합장의 세계] ②집에서 카페에서 뒷돈 받고 이권 넘겨… "결국 구속에 극단적 선택까지"

고성민 기자
입력 2020.02.06 06:00
"이주관리 용역, A업체로 선정해 주십시요."

2012년 6월 서울 송파구 가락시영 재건축(헬리오시티) 전 조합장 김모(60)씨의 송파구 자택 앞. 평소 김씨와 가까이 지낸 브로커 한모(65)씨가 김씨 집 앞에 찾아가 자신의 차로 부른 뒤 이같이 말했다. 현금 3000만원도 건넸다. 한씨는 이보다 앞서 서울 강남구 한 호텔 카페에서 A업체 대표를 만나 "가락시영 용역업체로 선정시켜달라"는 청탁과 현금 5000만원을 받기도 했다.

이후 A업체는 일사천리로 용역을 따냈다. 조합 규정은 10억원 이상 용역계약을 체결할 때 공개경쟁입찰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김씨는 A업체를 포함해 자신이 정한 6개 업체만 용역에 참여토록 제한했다. 6개 업체 중 A업체 계열사가 2곳 포함돼 후보 절반이 사실상 A업체였다. 계열사 2곳은 입찰가를 과도하게 높게 써, A업체 입찰금이 중간쯤으로 보이게 하는 역할이었다. A업체와 무관한 한 업체가 A업체보다 10억원 낮게 입찰했지만, 용역은 A업체 차지였다. 김씨가 이사들에게 "A업체가 가장 우수하다"고 입김을 넣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서울 강남의 한 재건축 아파트 단지 공사 현장. /조선일보DB
서울 강남의 한 재건축 아파트 단지 공사 현장. /조선일보DB
◇뇌물수수, 배임, 조합 청산 연기… 구치소 간 조합장 수두룩

6일 조선비즈가 사업비가 2조6000억원에 달해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이라 불린 가락시영 재건축 전 조합장 김씨 판결문을 열람한 결과 이같은 혐의가 적시돼 있었다. 김씨는 조합 정관을 통해 조합장 임기를 ‘사업종료 시까지’로 정하고 2003년부터 무려 14년여 동안 조합장을 맡으며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다.

이주용역업체 A사뿐 아니라 소방감리업체, 창호공사업체 선정 때도 한씨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경기 양평군 양수역 주변 도로, 양평군 한 식당 앞 도로 등 주로 김씨나 한씨의 차량 안에서 뇌물이 오갔다. 김씨가 받은 뇌물은 총 1억1600만원. 그는 이 혐의(특가법상 뇌물수수)로 2017년 2심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정비업계에선 김씨 사례가 그다지 특이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뇌물수수나 배임으로 기소된 조합장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1단지 전 조합장 김모(55)씨도 2018년 7월 뇌물 수수로 구속됐다. 김씨는 조합 대의원이었던 2011~2012년 B정비업체로부터 용역 수주 대가로 9500만원을 받은 혐의로 2019년 2심서 징역 1년 2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김씨는 2011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식당 등에서 B업체와 만나 "조합 임원과 대의원들에게 식사 등 접대를 통해 인맥 관리를 해야만 향후 조합장으로 당선되기 용이하다", "조합장으로 당선되면 B업체에 맞게 공고를 내서 정비사업 전문 관리업체로 선정되도록 대의원들을 움직여 주겠다"며 금품을 요구했다.

그는 서울 성동구 한 사무실에서 현금 2000만원, 서울 송파구 한 공인중개사무소 사무실에서 현금 5000만원 등 9500만원을 받았다. 김씨는 2013년 조합장에 선출됐는데, 이후 정비업체에 일감을 주지 않자 정비업체가 그를 고소했다.

시공사로부터 억대의 돈을 받은 재건축조합장과 전직 시의원이 2017년 11월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비리가 터진 경남의 한 재건축 조합 사무실. /부산경찰청 제공
시공사로부터 억대의 돈을 받은 재건축조합장과 전직 시의원이 2017년 11월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비리가 터진 경남의 한 재건축 조합 사무실. /부산경찰청 제공
조합 청산을 늦추다 구속된 사례도 있다. 대구수성경찰서는 지난해 11월 대구 수성구 황금주공(황금캐슬골드파크) 재건축 조합장 서모(63)씨를 구속했다. 서씨는 2006년 아파트 입주 이후 13년간 조합 청산을 하지 않고 조합비 7억6000여만원을 월급 등으로 받아가 사적으로 쓴 혐의(특가법상 횡령)를 받는다.

서울 은평구에선 한 재건축 조합장(63)이 2016년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건설업체에 10억원을 요구했고 2억원을 받았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가 숨진 채 발견된 지 3개월여 만에 조합장에게 돈을 건넨 혐의를 받던 한 건설업체 관계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부패 조합장으로 인한 피해, 조합원이 짊어져야

부패 조합장은 자신이 형사처벌을 받고 구치소에서 말로를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조합원들에게도 피해를 끼친다. 조합비는 조합원 모두의 돈이기 때문에 조합장이 허투루 쓴 조합비는 조합원 추가분담금 상승으로 직결한다. 조합장이 구속되기라도 하면 새 조합장을 선출할 때까지 사업이 지연돼 금융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가락시영은 2015년 일반분양을 마친 뒤 조합장이 구속돼 그나마 사업 지연은 크게 겪지 않았다. 개포주공1단지는 조합장 구속 3개월 전인 2018년 4월 관리처분 인가를 받고 이주 작업을 하던 때였다. 당초 2018년 9월까지 이주 완료 계획이었는데, 일부 상가 주민이 퇴거에 불응하면서 내홍을 겪는 중이었다. 이 시기 조합장이 구속되면서 추진력이 약해져 사업이 늘어졌다. 2018년 12월 새 조합장이 선출된 이후 이듬해 4월 이주를 마쳤다.

조합장이 자신의 월급을 더 타기 위해 조합 청산을 지지부진하게 하는 것도 조합원 모두의 손해로 이어진다. 재건축을 마치면 조합은 청산 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사용한 비용을 결산하고 추가이익을 나누거나 조합원들에게 추가분담금을 요구한다. 그런데 조합 측이 불필요한 소송을 걸면서 소송 대응을 핑계로 조합을 유지하면서 조합장이 월급을 타간다면 그만큼 조합원 추가이익이 줄어들거나 추가분담금이 늘어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