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만들다 비행기 개발해요" 조선업 R&D 인력 흡수하는 KAI, 매년 100명씩 쓸어가

최지희 기자
입력 2019.12.11 06:00 수정 2019.12.11 07:47
2016년부터 4년간 조선업체 인력 373명 KAI로 이직
연평균 93명…대부분이 연구개발 엔지니어
전공·개발과정 비슷해 전직 쉬워…"계속 이어질 것"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에서 12년간 선박 설계·관리 일을 해 온 40대 초반 이형원(가명) 책임연구원은 2016년 한국항공우주(047810)(KAI)로 이직을 결심했다. 2015년 말부터 고사 위기를 맞은 국내 조선사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근로자 수를 줄여나갔다. 동료들의 책상이 우후죽순 빠져나갈 때 이씨는 4개월 먼저 퇴사해 KAI에 둥지를 튼 동료를 만났다. "냉정하게 현실을 보면 미래는 이쪽이야. 해오던 일이랑 비슷한 부분도 의외로 많아."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선박만 보며 달려왔던 이 연구원은 동료의 말에 처음으로 항공업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게 됐다. "12년간 쌓아온 커리어가 무너질까 두려웠고 거주지도 사천으로 옮겨야 했지만, 국내 조선업이 붕괴하는 와중에 막 걸음마를 뗀 항공 우주 산업의 미래가 그나마 밝다고 봤어요." 3개월여 고민을 거듭한 이씨는 KAI 연구·개발(R&D) 경력 채용 공고에 지원했다. 면접관은 이 연구원의 조선 설계 관리 경험을 눈여겨봤고, 11월 그는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 KF-X 사업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부서에 배치됐다.

지난 10월 14일 오전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서울 ADEX 2019) 프레스 데이 행사에서 공군의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KF-X)의 실물모형 등이 공개됐다. /연합뉴스
지난 10월 14일 오전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서울 ADEX 2019) 프레스 데이 행사에서 공군의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KF-X)의 실물모형 등이 공개됐다. /연합뉴스
10일 KAI에 따르면 올해 경력직으로 입사한 R&D 인력 329명 중 24%인 79명이 조선회사 출신인 것으로 확인됐다. 2016년부터 4년간 경력직 채용 인원 1169명 가운데 31.9%(373명)가 조선회사 출신이었다. 연 평균으로 따지면 93.3명에 달한다.

KAI는 2016년부터 R&D를 중심으로 경력직 채용을 대폭 늘렸다. 한국형전투기(KFX)와 소형무장헬기(LAH)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연구·개발·사업관리 등에서 대규모로 사람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KAI의 경력직 고급 인력 풀(pool) 가운데 하나는 조선업이었다. 2016년과 2017년에는 조선업 출신이 각각 207명 중 72명(35%), 249명 중 133명(53%)에 이른다. 작년에 뽑힌 384명 중 89명(23%)도 조선 인력이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는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STX조선, 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 등 19곳이다.

가령 이 연구원의 부서엔 조선소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인력만 다섯 명이다. 조선업과 항공업은 일견 유사성이 없어 보이지만, 수송 기계를 제조하는 점과 대형 군수 사업이라는 측면에서 직무 연관성이 높다. KAI 측은 "군용 선박을 개발할 때 방위사업청 산하에서 사업을 따내고 탐색 개발과 체계 개발, 초도 양산을 하는 시스템이 우리 쪽과 상당히 유사하다"며 "조선 숙련 인력이 체득해 온 체계와 계통 구성이 비슷해 업무도 빠르게 습득한다"고 설명했다.

그래픽=이민경
그래픽=이민경
이 책임연구원도 "시스템 간 체계 종합과 전문적인 관리 시스템, 개발 프로세스가 유사하다"며 "조선업에서 습득한 개발 프로세스를 항공 개발에 적용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도 보인다"고 말했다.

한 KAI 관계자는 "조선업체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숙련된 엔지니어들이 갑작스레 대규모로 필요하던 시기에 조선업 불황으로 이직 의향자가 꽤 있어 회사 운영에는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고급 엔지니어를 제때 확보하지 못했다면, KFX나 LAH 사업 진행에 큰 차질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KAI는 올해부터 당초 항공·기계·전기 등으로 나뉘던 지원 요건을 세분화해 조선·자동차 등을 추가했다. 이를 본 이씨는 "조선소 출신 인력이 KAI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뿌듯했다"고 했다. 그는 "조선 인력이 많이 옮겨오면서, 업계에도 소문이 나 KAI에 지원하려는 후배들이 꽤 많다"고 했다.

KAI의 대형 사업이 지속하는 한 조선업 숙련 인력의 이직은 계속될 전망이다. 국내 조선업체들이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올 3분기 영업손실 3120억원을 기록한 삼성중공업은 최근 올해 첫 대규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