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여왕이 사랑한 브랜드, 알고보면 한국 제품

런던·에든버러=석남준 기자
입력 2019.12.03 03:11

- 영국 전통 사들이는 이랜드 여왕의 담요 만드는 '로케론', 떡볶이 코트 원조 '글로버롤' 역사있는 브랜드들 인수 통해 업무 방식·명품 네트워크 흡수


지난 5일 영국 런던에 있는 패션브랜드 글로버롤(Gloverall) 본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외동딸인 앤(69) 공주가 이곳을 찾아 10여 명의 직원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1951년 창업 이래 줄곧 '메이드 인 잉글랜드(Made in England)'를 고수하고 있는 글로버롤을 격려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이랜드그룹 김일규 부회장과 김성호 유럽법인장이 함께했다. 무슨 까닭일까.

◇헤리티지, 사서 배운다

글로버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군인들이 입었던 이른바 더플코트를 처음으로 제품화해 판매하기 시작한 회사다. 더플코트는 단추 대신에 떡볶이 떡처럼 생긴 나무 단추(토글)를 끈으로 여미도록 한 게 특징으로 흔히 '떡볶이 코트'로도 불린다. 글로버롤은 2차 대전 당시 영국의 명장 몽고메리 장군의 별명을 딴 '몬티' 더플코트 등을 30여 국에 수출하고 있다. 41년 전인 1978년에 영국 여왕으로부터 수출상도 받았다. 김 부회장 등이 영국 공주 방문에 배석한 이유는 이 브랜드의 주인이 이랜드이기 때문이다. 이랜드는 첫 해외 브랜드 인수 대상으로 지난 1995년 글로버롤을 택했다.

이랜드가 2011년 인수한 로케론사의 스코틀랜드 본사에 걸려 있는 사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외부 행사에 참석했을 때 무릎에 덮은 담요가 로케론사 제품이다. 로케론 측은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가 여왕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캐시미어 담요 2개를 사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석남준 기자
이랜드가 2011년 인수한 로케론사의 스코틀랜드 본사에 걸려 있는 사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외부 행사에 참석했을 때 무릎에 덮은 담요가 로케론사 제품이다. 로케론 측은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가 여왕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캐시미어 담요 2개를 사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석남준 기자
글로벌 패션업계에서 역사가 길지 않거나, 이탈리아·프랑스·영국 등 유럽 주요 국가 혹은 미국 '출신'이 아닌 회사가 명품 대접을 받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일본, 중국 등의 패션회사나 상사가 자체 브랜드를 키우는 동시에 쉽게 얻을 수 없는 헤리티지(유산)를 확보하기 위해 전통 깊은 회사를 인수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랜드도 마찬가지다. 글로버롤을 시작으로 이탈리아의 코치넬레, 만다리나 덕 등 해외 브랜드를 잇따라 인수했다. 이랜드의 인수 브랜드 중에는 스코틀랜드의 로케론(Lochcarron)도 포함돼 있다. 2011년 이랜드가 인수한 로케론은 타탄(체크무늬) 원단 전문 기업 중 세계 최대로 꼽힌다. 1892년 시작한 로케론은 체크무늬 원단을 개발·생산하고, 이 원단으로 스카프, 담요 등을 만드는 회사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야외 행사에서 이 회사의 무릎 담요를 애용한다. 로케론은 뉴욕시, 영화 슈렉,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맨체스터시티, 골프대회 라이더컵 등과 손잡고 새로운 체크무늬를 만들기도 했다. 로케론 CEO 돈 롭슨-벨은 "이랜드에 인수될 당시 헤리티지 브랜드를 해외에 판다는 데 내부 반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랜드의 투자를 받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이랜드에 인수된 뒤 우리가 잘하는 일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브랜드와 네트워크를 얻다

지난해 이랜드가 갖고 있는 영국 브랜드인 글로버롤, 로케론의 매출 합계는 1264만파운드(약 193억원)로 집계됐다. 이랜드그룹 전체 매출(2018년 9조5000억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사실 미미하다. 하지만 이랜드는 매출 이상으로 얻는 게 많다는 입장이다. 김성호 이랜드 유럽법인장은 "글로버롤, 로케론 등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면 영국 유명 백화점이나 명품 브랜드의 대접이 달라진다"며 "겉으로는 영국 브랜드를 인수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헤리티지 브랜드의 일하는 방식과 네트워크를 자연스럽게 흡수해 R&D(연구·개발) 효과를 얻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글로버롤은 시즌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사카이, 라코스테 등 세계적인 브랜드와 협업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로케론 역시 버버리, 루이비통, 베르사체 등에 원단을 납품하거나 함께 작업하고 있다. 이랜드는 글로버롤과 자사 내 다른 브랜드와 협업도 벌이고 있다. 앞서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인 스파오, 이랜드가 국내 라이선스를 갖고 있는 뉴발란스, 중국에 진출해 있는 이랜드 등이 글로버롤과 협업한 제품을 내놓았다. 이랜드 관계자는 "글로버롤과 협업한 제품은 순식간에 완판됐다"며 "앞으로 인도 등 신흥 시장 진출에 힘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이랜드의 해외 매출 비율은 20%였다.